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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는 멀티버스 사가가 시작된 이후로 마블에 대한 기대치를 조금씩 낮춰왔습니다. 그런데 시네마콘 2026에서 공개된 어벤져스: 둠스데이 예고편 현장 후기를 접한 순간, 그 낮아졌던 기대가 다시 불쑥 올라오는 걸 느꼈습니다. X맨, 판타스틱 4, 와칸다, 아틀란티스까지 한 화면에 담긴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블 골수팬으로서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시네마콘 현장, 예고편 공개 전부터 달랐다
행사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먼저 얘기하지 않으면 이 글이 반쪽짜리가 됩니다.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Kevin Feige)가 등장했을 때부터 객석의 온도가 달라졌다는 후기들이 일관되게 들렸습니다. 여기서 케빈 파이기는 MCU, 즉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의 모든 작품을 총괄하는 프로듀서로, 어떤 작품에 그가 직접 등장한다는 건 해당 영화가 마블의 핵심 라인업에 속한다는 신호와 같습니다.
루소 형제(Russo Brothers)까지 무대에 오르면서 분위기는 완전히 달아올랐습니다. 루소 형제가 연출했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엔드게임이 역대 마블 흥행의 정점을 찍었던 만큼, 그들의 복귀 자체가 팬들에게는 일종의 보증수표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저도 이 부분에선 냉정하게 보기가 어렵습니다. 인피니티 워를 극장에서 세 번 봤던 사람으로서 루소 형제의 이름이 붙는다는 것만으로 어딘가 안심이 되는 게 사실이니까요.
보안 수준도 예사롭지 않았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행사 전 가방 검사는 물론, 예고편 상영 중 휴대폰을 들면 녹색 레이저 포인터가 즉각 날아왔고, 덩치 큰 보안 요원이 복도에서 해당 관람객을 직접 불러내 녹화 영상을 삭제했다고 합니다. 시네마콘 전 세션을 통틀어 가장 강도 높은 보안이었다는 건, 그만큼 이번 예고편이 마케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카드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줍니다.
닥터둠의 연출, 왜 롤링스톤스였을까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RDJ)가 닥터둠으로 입장할 때 흘러나온 곡이 롤링스톤스의 Sympathy for the Devil이었다는 대목에서 저는 즉각 납득이 됐습니다. 이 곡은 단순한 악마 찬가가 아니라 인류 역사의 비극을 관조하는 시점으로 구성된 가사가 핵심입니다. 닥터둠이라는 캐릭터가 단순한 빌런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과 권력 구조 전체를 내려다보는 철학적 독재자라는 설정과 거의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선곡입니다.
복장과 무대 연출이 온통 초록색으로 채워진 것도 코믹스 원작 팬이라면 바로 알아챌 수 있는 장치입니다. 닥터둠의 트레이드마크인 초록 망토와 철갑 슈트는 라트베리아(Latveria)의 군주이자 세계 최고의 지성을 가진 독재자라는 캐릭터의 상징입니다. 라트베리아란 마블 코믹스에서 닥터둠이 통치하는 동유럽의 가상 국가로, 수도인 둠슈타트(Doomstadt)는 이번 예고편에서 닥터둠이 무릎을 꿇고 등장하는 배경 장소로 등장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싶은 건 RDJ의 목소리 연기입니다. 가면을 벗지 않으면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라는 걸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발성 자체가 완전히 달랐다는 후기가 있었습니다. 보이스 피치(voice pitch), 즉 목소리의 음높이와 발성 방식을 의도적으로 바꿔 캐릭터의 위압감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건 아이언맨 시절의 경쾌한 RDJ와 완전히 결별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졌습니다.
예고편 핵심 장면 정리, 진짜 소름 포인트는 여기
현장 후기를 토대로 이번 예고편의 핵심 시퀀스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완전히 폐허가 된 X맨션(Xavier's School for Gifted Youngsters) 간판이 바닥에 쓰러진 채 시작. 패트릭 스튜어트(Patrick Stewart)가 연기하는 프로페서 X가 창밖의 에너지 파장을 바라보며 체념과 두려움이 공존하는 표정으로 등장
- 닥터둠의 보이스 오버: "뭔가가 다가오고 있어. 우리가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를 뭔가가"
- 뉴 어벤져스 타워(New Avengers Tower) 부감 쇼트. 빨간색·흰색의 클래식 A 로고가 건물 전면에 크게 부각됨
- 세임슨, 앤트맨, 버키, 썬더볼츠 멤버들, 토르가 집결. 와칸다와 아틀란티스 세력도 합류
- 겜빗(Gambit)이 샹치와 격돌. 카드 트릭과 지팡이 vs 텐링(Ten Rings) 대결
- 미스틱(Mystique)이 옐레나(Yelena)로 변신해 두 명의 플로렌스 퓨가 육탄전을 벌이는 장면
- 토르가 스톤 브레이커로 닥터둠을 내리찍으나 닥터둠이 두 손가락으로 막음
- 스티브 로저스(Steve Rogers) 등장. 손을 뻗자 뮬리가 손으로 착 들어오며 예고편 종료
프로페서 X의 등장이 특히 강렬했던 이유는 이것이 X맨의 MCU 합류를 가장 명확하게 선언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멀티버스 충돌(Multiverse Incursion)이라는 개념, 즉 서로 다른 평행 우주가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하나가 소멸되는 현상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첫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 개념은 마블 코믹스의 시크릿 워즈(Secret Wars)로 이어지는 핵심 설정입니다.
기대와 우려 사이, 이 예고편이 남긴 질문
솔직히 이건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마음 한편에 걸리는 부분도 없지 않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번 라인업을 보며 "역대급 크로스오버"라고 반응하는 건 충분히 이해됩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하지만 마블이 엔드게임 이후로 캐릭터의 양적 확장에 집중하면서 정작 개별 캐릭터의 서사적 깊이가 얕아졌다는 지적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이번에도 울버린, 스파이더맨, 데어데블, 데드풀이 빠져 있다는 점을 두고 "편집된 것"이라는 시각과 "처음부터 제외된 것"이라는 시각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로다주와 루소 형제의 복귀를 두고도 의견이 나뉩니다. "검증된 조합이 돌아온 것"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조금 다른 관점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공한 공식에 다시 기대는 방식은, 마블이 앤트맨: 퀀텀매니아와 이터널스 이후로 잃어버린 신뢰를 빠르게 회복하려는 전략으로 읽히기도 하거든요. 그것이 반드시 나쁜 선택은 아니지만, 본편이 과연 예고편의 박진감과 비장미를 2시간 넘게 유지할 수 있을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마블 스튜디오는 현재 MCU 페이즈 5와 6을 멀티버스 사가(Multiverse Saga)라는 이름 아래 운영하고 있습니다(출처: Marvel Studios 공식 사이트). 멀티버스 사가란 서로 다른 평행 우주의 캐릭터들이 하나의 스크린에 집결하는 대형 크로스오버 서사를 의미하며, 어벤져스: 둠스데이는 이 사가의 사실상 클라이맥스에 해당합니다. 흥행 전문 매체 박스오피스 프로(Box Office Pro)는 이 작품의 북미 오프닝 주말 흥행 수익을 2억 5천만 달러 이상으로 예측한 바 있습니다(출처: Box Office Pro).
올 연말에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의 재개봉도 예정되어 있습니다. 둠스데이와 직결되는 미공개 장면이 추가된 버전이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 이건 단순한 재개봉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마블이 관객에게 17년 치의 감정적 연결고리를 다시 꺼내 들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니까요.
예고편 하나로 결론을 내리기엔 아직 이릅니다. 하지만 이번 시네마콘 프레젠테이션이 남긴 인상만큼은 분명합니다. 마블이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관객을 설득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 나머지는 본편이 증명해야 할 몫입니다. 올 연말 재개봉부터 내년 본편까지, 마블 팬으로서 일정을 비워둘 이유는 충분합니다.